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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1. 행복수성
  2. 수성구 소개
  3. 지명유래
  4. 고산동

동명유래

  • 고산(孤山)은 아주 옛날 삼한(三韓)시대 에는 압독 또는 압량이라는 조그만 나라의 일부였다가 신라에 합쳐졌으며 신라 경덕왕(741년)때는 장산군(獐山郡) 읍서면(邑西面)이었는데 고려 현종9년(1018년)에는 경주군 서면에 속했고 충선왕(1308년)때는 옥산부(玉山府)서면이라고 불렀다.
  • 조선 선조(1577년)때 경산현(慶山縣)이 대구부에 속하게 되자 대구부 부동면(府東面)이 되었다가 경산이 다시 현이 되자(1897년) 경산현 현서면이 되었다.
  • 조선 고종 때 경산군 서면이라 고쳐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산군 고산면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고산면에는 13개의 법정동이 있었다.

고산동의 자연부락 유래

고산동의 자연부락 유래- 시지동(時至洞), 사월동(沙月洞), 욱수동(旭水洞), 봉암(鳳岩), 노변동(蘆邊洞), 매호동(梅湖洞)·우산(牛山), 성동(城洞), 신기(新基), 내매(內梅), 망곡(亡谷), 배내·이천동(梨川洞), 담티고개, 송정(松亭)고개, 세청, 고모동(顧母洞), 팔현동(八峴洞), 가천동(佳川洞), 내환동(內患洞), 대흥동, 외곶(外串), 삼덕동(三德洞), 덕천(德川), 연호동(蓮湖洞), 도장골과 도장지(陶場池)
시지동(時至洞) 시지동은 옛날에 부산- 청도- 경산- 대구- 서울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으며, 그래서 이곳에 나라의 일로 여행하는 관리들의 잠자리와 음식을 대어주던 시지원이라는 여관이 있었고 시지동이란 이름은 시지원에서 따온 것으로 짐작된다.
사월동(沙月洞) 이 동네는 약 350년 전 김해 김씨가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이루어졌으며 처음에는 나무가 울창한 산지였고 마을 이름은 사돌(四乭)이었다고 한다. 현재 김씨의 산소 옆에 큰바위 4개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욱수동(旭水洞) 지금부터 약500년전 '경원'이라는 선비의 조부가 이마을을 개척하였는데 처음에는 '상동'이라고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욱수동이라 부르게 됨. 느리,참새,명인곡,선돌 등이 욱수골 동편에 위치하고 골의 깊이는 약 6㎞에 달한다.골서편에 까꾸랭이, 범둔골 등을 망월곡이라 하며 동·서 한가운데 옛성터인 자산성이 있고 맥반석이 많아 물이 맑고 수질이 좋아 동명을 욱수라 부르게 되었다고 함.
봉암(鳳岩) 이 마을은 욱수천 골짜기에 있는데 마을 앞 동산의 모양이 봉처럼 생겨서 봉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노변동(蘆邊洞) 고려시대(1357년경)에 의성 김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마을 주변에 갈대숲이 무성하여 '갈변동'이라고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노변동이라고 고쳐 불렀다.
매호동(梅湖洞)·우산(牛山) 우매(牛梅)라는 마을 북서쪽에 산이 하나 있는데 앞에서 보면 암소가 송아지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으로 보인다고 하여 우산(牛山)이라 불리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우산마을과 우매마을이 합쳐져서 매호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 한가운데 내환동 골짜기에서 시작하여 시지동을 거쳐 금호강으로 흘러가는 매호천이 흐르고 있다.
성동(城洞) 마을 뒷산인 고산에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토성이 있기 때문에 성동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성산봉대(城山熢臺), 고산서당 등 사적이 있으며 북쪽에는 금호강이 흐르고 있다.1850년쯤 진용백이란 분이 경영하던 행자정이라는 상점이 있었다는 행자정 마을, 옛 고산서원이 있었던 서원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신기(新基), 내매(內梅), 망곡(亡谷) 오래전에 아산 장씨가 개척하고 살았는데 동네 서쪽으로 망곡(亡谷) 흐르던 욱수천이 동쪽으로 흐르게 되어 서쪽에 새로 동네가 하나 생기니 이곳을 신기(新基)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신기마을의 안쪽에 있다고 하여 부르게 된 내매(內梅)마을이 있고 지금의 동양염공 남쪽 새한 공장 경계에는 고을이 망했다는 망곡(亡谷)골짜기가 있다. 또 마음골이라는 심곡지(心谷池)와 독인지(獨人池)가 있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기(新基)와 내매(內梅)를 합쳐 신매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배내·이천동(梨川洞) 1600년경에 김해김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고 마을 하천 앞에 배나무가 많이 있다하여 '배내'라고 한다. 그 위치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담티고개 1609년에 두씨라는 분이 약방을 경영하면서 당시 벼슬을 지냈으며, 살아 생전에 자신의 명당 묘터를 구하려고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온 고을을 헤매다가 현재 고산서원 자리가 명당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거기까지 갔으나, 이미 주춧돌이 놓여 있기에 이를 애통하게 생각하고 다른 명당자리를 구하러 갔다가 병의 증세가 더욱 악화되고, 담이 끓기 시작하여 현 담티고개 지점인 이 고개에서 운명을 하였다고 하여 현재까지 담티고개라 부르고 있다.
송정(松亭)고개 대구-경산간 현 도로는 조선 말엽 경주-울산에서 서울로 가는 주요도로로 고산파출소에서 송정고개 도로 옆에 소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고 하여 송정고개라고 부른다. 현재는 고산2동 사무소 앞으로 나있는 도로에 위치한다.
세청 옛날 전설에 의하면 마을 앞에 깊은 자연샘이 있었는데 샘의 깊이가 연실 한 꾸리가 들어갔다 하여 샘의 이름을 '연골샘'이라 부르고 골 이름도 '연골'이라 하였고 샘천이 지금은 세청이라고 칭하여지고 있다.
고모동(顧母洞) 조선 태조때 옥산인(玉山人) 전백영(全伯英)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고모촌으로 이름하였으며 6.25사변 때는 전방에서 부상병을 실은 병원차가 항상 고모역에 대기하고 있다가 대구와 김해에 있는 육군병원으로 후송하였다고 한다. 대구에서 영천으로 가는 고갯길이 고모령으로 이 고갯길에는 ‘비내리는 고모령’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팔현동(八峴洞) 조선초 전백영(全伯英)이라는 선비가 지금의 팔현을 개척하였으며, 그 후손이 묘소부근에 향나무를 심었던 바, 그 향나무가 팔자형(八字型)으로 자라 거기서 팔자(八字)의 한자를 빌리고 대구로 통하는 고개 밑에 마을이 있었으므로 팔현(八峴)마을이라 불렀다고 하며 지금도 팔자형의 향나무가 있고 흰덤(흰서미) 골짜기에는 금호강에서 날아온 백로가 온 산을 하얗게 덮었기 때문에 흰덤 또는 백등산(白燈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는 철새 도래지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3월~6월 사이에 왜가리가 서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천동(佳川洞) 옛날에 장뚝못(장태못)이 있는 골짜기에서 흐르는 냇물이 맑고 좋아서 마을 이름을 '좋을가(佳)'자와 '내천(川)'자를 따서 가천동이라고 불렀으며 이 마을 북쪽에는 고을원님이 살았다는 원당골(員堂谷)이 있는데 지금도 집터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원님을 만나기 위해 타고 온 말을 메어 두었다는 말미골도 있다.
내환동(內患洞) 내환동 앞으로 동서로 통하는 도로는 옛날에는 한양으로 가는 국도였다.
대흥동 고려 현종(1034년) 때 문충공(文忠公) 연재선생이 이 길을 지나가다가 마침 날이 저물어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주민들의 고마운 대접에 연재선생이 곡기(谷己)라 지어 주었으며 그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내곶동(內串洞)이라 하였으나 내곶(內串)을 내환(內患)으로 오기하여 내환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동명이 내우외환을 연상시킨다는 주민의견에 따라 행정자치부의 승인을 받아 2002년부터 대흥동(大興洞)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사용하고 있다. 현재 국내 최대규모(65,857석)의 대구 스타디움이 자리하고 있다.
외곶(外串), 삼덕동(三德洞) 밀양박씨가 약 300년 전에 이 마을에 들어와 개척하였으며, 개척 당시 큰 강이 있었는데 산과 도로를 중심으로 밖에 강이 있었다고 하여 외곶이라 하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삼덕동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덕천(德川) 동남쪽으로 우뚝 솟은 대덕산이 자리잡고 산아래 흐르는 물이 좋다하여 덕천이라 하였다. 송정고개에서 남서쪽으로 1㎞ 지점에 위치한다.
연호동(蓮湖洞) 조선 인조(1635년)때 제갈 문몽(諸葛 文夢)이라는 선비가 정착하여 살았다. 마을 앞에 못이 있었는데 여기에 연꽃이 많이 핀다 하여 연지(蓮池)라 하였으며 낮은 늪지대여서 갈대와 연꽃이 많이 자라고 있었고 금호강물이 넘치면 물길이 이곳까지 밀려들어와 늪이 마치 호수처럼 보여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부터 연꽃을 많이 심고 보호하였으므로 마을 이름을 연호동 또는 연지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후기부터 점차 농토를 넓히기 위해 늪지대를 메워 들어갔는데, 일본침략기에 지금의 연호지라는 못만 두고 완전히 메워 논으로 만드는 바람에 지금과 같은 들판이 되었다고 한다.
도장골과 도장지(陶場池) 연호동의 북쪽에서 고모동으로 가는 길 옆에 위치하며 양지바르고 그릇을 만드는데 알맞은 흙이 있어 생활에 필요한 질그릇을 구웠으며 지금도 깨어진 그릇들이 나오고 있다하고, 그 후 흙을 파낸 곳에 물을 사용하기 위하여 못을 막고 도장지라고 불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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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