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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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서원(梧川書院)
조선시대 서원에 대해 잠시 언급한 후 오천서원에 대해 설명할까 한다.
서원은 조선조 선비들의 혼이 깃든 곳으로 선비들의 문화와 영욕(榮辱)을 함께 하면서 우리 교육사에서 빛과 어둠의 두 자취를 남겨 놓았다.
초창기 서원은 선비정신이 충만한 학문의 도장(道場)으로 성리학의 세계 속에서 성인(聖人)을 향한 구도(求道)의 열정을 불태웠던 곳으로 양반 관료제 사회를 지탱하는 지식인 관료집단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장소였으나 후세에 이르러 서원의 난립으로 권력화된 정치집단으로 변질되어 정쟁(政爭)의 장이 되면서 서원 본래의 선비를 양성하는 교육기능은 유명무실해지고 선현들을 제사 지내는 제향(祭享)기능으로 변질되었다.
오천서원은 조선 성종 때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대봉(大峰) 양희지(楊熙止)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1744년(영조 20)에 건립된 것으로 대구지역의 23개 서원 가운데 4번째로 건립되었으며, 대봉 선생은 평안도 중화 출신으로 1474(성종 5)문과에 급제하였다.
오천서원은 야트막한 야산기슭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2개의 영역으로 분리 배치되어 있다. 좌측으로 외삼문(外三門), 강당(講堂), 제수청(祭需廳)이 일곽(一廓)을 이루고 있으며 강당 우측에 제향공간(祭享空間)인 사당이 한단 높게 토장(土墻)으로 둘러싸여 일곽(一廓)을 이루고 있다.
외부에서 별도로 진입할 수 있게 강당과 사당의 출입이 분리되어 있으며, 향사(享祀)시 활동이 편하도록 강당 우측에 협문(夾門)을 두어 사당과 연결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로 가운데 2칸 마루를 두고 좌우에 방을 배치한 전형적인 강당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건물 앞쪽과 마루 뒤쪽에 퇴를 두었고 우측 온돌방은 마루와 4분합 들문을 두어 공간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하였고 좌측 온돌방은 우측과 달리 쌍여닫이문을 설치해 두었고 마루 앞쪽에 4분합 들문을 설치하여 폐쇄된 마루를 구성한 점은 남부지역 강당평면에서 보기 드문 예라 할 수 있다.
사당인 오천사(梧川祠)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전퇴(前退)가 없는 홑처마 맞배지붕의 3량가구 건물이나 제대로 격식을 갖추지 못하였다. 사당 뒤편에는 양희지를 추모하는 비석 5기가 있다.
상세정보
위치안내
- 소재지 : 수성구 파동 433번지 위치보기
- 본 향토문화유산은 지정문화재가 아니며, 사유재산으로써 개인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방문을 계획하실 경우, 사전에 수성구청 담당자에게 연락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