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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시인 이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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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시인 이상화 생전 모습과 비석 모습

시인 이상화는 1901년 4월 5일 대구에서 태어나 1943년 4월 25일 짧은 생을 마감했다. 나라를 잃은 민족적 비애는 그에게도 떨쳐버릴 수 없는 한(恨이)었다. 여덟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 이일우 슬하에서 자라며 민족성향의 틀을 갖추었다. 1919년 3월 8일에는 ‘대구 3․1운동’을 주도했고, 1923년 관동대학살 사건을 일본에서 겪으며 제국주의 실상을 목격했다.민족애를 온 몸으로 깨닫는 계기였다.

그런 이상화에게 저항의 도구는 오로지 ‘시’ 뿐이었다. 1926년 ‘개벽’에 실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그렇게 태어났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이상화는 수많은 저항시를 쏟아낸다. 사실 시 창작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고, 시대와 호흡하며 일제에 저항할 수 있는 길이었다.
‘민족시인’이라는 수식어가 그에게 늘 따라 붙는 이유다. 특히 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작품 배경은 수성들로 알려져 있다. 수성들은 지금 수성못이 들어선 일대와 들안길 주변을 말한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詩碑)와 시문학거리가 상화동산에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화동산 역시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민족시인 이상화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의 작품 배경

빼앗긴 들에도.. 의 자품 배경이 된 수성들.. 민족 애환이 서린 그곳에서 시인은 절규하다

한 갈래의 길 민족 성향의 틀을 잡다. 낮에도 밤, 밤에도 밤 온 몸으로 부딪 힌 만족애 들판을 보며 절규하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온몸으로 부딪힌 민족애 생존권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 조선인 지주들도 선뜻 동참 조선병 그는 떠났지만 시비에 민족 정신을 새기다 그곳 수성못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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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자료수정일
2019.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