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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2

제2강 이덕일-[조선후기 정치사를 어떻게 볼것인가?] 1부

학력: 숭실대학교 사학과 / 숭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 박사 경력: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수상: 2009 조만식숭실언론인상 저서: 내 인생의 논어 그 사람 공자 / 일생에 꼭 한 번은 들어야 할 명강 /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등 83여종 내용정리: 조선 후기 정치사의 현재적 이해 1. 조선 사회의 근본적 위기 1)임진왜란 *유성룡의 면천법(免賤法)과 속오군(束伍軍) 등으로 위기 극복했으나 종전후 폐지 *광범위한 민심 이반 2)인조반정의 논리 : 율곡 이이의 제자들인 서인들이 주도, 명나라 황제가 임금이고 조선 임금은 제후(諸侯)에 불과하다는 주장, 조선 임금은 사대부들중의 제일사대부와 같다고 봄. *1차 예송논쟁 : 효종 국상 때 서인들이 기년복(朞年服:1년복) 주장하고 남인들이 참최복(斬衰服:3년복) 주장하는 근본 요인 *2차 예송논쟁 : 인선왕후 장씨(효종비) 국상 때 서인들이 대공복(大功服:9개월) 주장하고 남인들이 기년복(朞年服:1년복) *1차 예송은 서인들이 승리했지만 2차 예송 때 남인들이 승리해 정권교체(현종 말 ~ 숙종초) 3)민심 이반 수습책 *서인(송시열 중심) : 주자학 유일 사상 강조, 예론(禮論) 강화하는 것으로 신분제를 양반 사대부 중심으로 강화하려 함-양반 사대부의 기득권 중시(호포제 반대) *남인(윤휴 중심) : 주자학 상대주의 주창, 신분제를 완화해 백성들의 신분 상승을 허용하는 것으로 사회 위기를 극복하려 함(호포제 주장) - 윤휴: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 알고 나는 모른다는 말이냐? 4)북벌에 대한 견해 *청나라 강희(康熙) 13년(조선 현종14년) 청나라에서 ‘삼번(三藩)의 난’이 발생 - 한족(漢族)출신 오삼계(吳三桂)ㆍ상가희(尙可喜)ㆍ경계무(耿繼茂)의 세 번왕(藩王)이 청나라에 대항해 봉기한 사건 *청남(淸南) 영수 윤휴는 삼번의 난을 이용해 북벌 단행하자고 주장 *탁남(濁南) 영수 허적은 준비는 하되 방어전 주장 *서인은 북벌 자체에 반대-현재 교과서는 송시열이 북벌 주창했다고 호도 2. 주자학 유일사상 사회의 형성 1)노론 일당 전제의 형성 *정권이 서인으로 교체 된 후 윤휴 사형 - 주자학 유일사상 사회 형성 2)외주내양(外朱內陽)의 이중적 태도 형성 - 겉으로는 주자학자인 척하면서 속으론 양명학 신봉 3)하곡 정제두(鄭齊斗)의 양명학 선언 - 강화학파의 형성 3. 주자학 유일사상 사회에 대한 도전 1)영조와 사도세자 *경종독살설 속에 즉위한 영조 - 독살설의 이론적ㆍ정치지형적 구조 - 영조 4년 이인좌의 난 발생 - 탕평책의 붕괴:영조 31년(1755)3월 나주벽서 사건 발생 - 노론 일당 전제(專制) 시작 *사도세자 사건(영조 38년(1762)) - 소론 지지하는 사도세자 제거 - 세손(정조) 축출 시도 실패 2)정조 시대의 이해 *미래 지향 - 다원화 사회를 지향(노론 일당전제-다당제로) - 사상의 다원화(양명학ㆍ서학 용인) - 신분제 완화 - 규장각 검서관에 4서자: 이덕무(李德懋)ㆍ박제가(朴齊家)ㆍ유득공(柳得恭)ㆍ서리수를 임명 - 사회 밑바닥의 신분제 철폐의 움직임에 호응. *실용 중시 - 문체반정의 의미 - 이념논쟁에서 벗어나고 남인 신서파(信西派)를 보호하기 위한 것 - 화성 신도시 건설 *정조 갑자년(1804) 구상에 의해 건설 - 재위 13년(1789) 사도세자 묘소 이전:양주 매봉산에서 수원화산으로 - 정약용이 중국 윤경(尹耕)의 『보약(堡約)』과 유성룡의 『성설(城設)』을 참고해서 「성설(城設:화성 설계도)」작성 - 근대 실학정신의 구현:백성들의 강제 노동(부역)이 아니라 임금 노동에 의해 건설 *새로운 형태의 계획 도시 - 상업혁명 선도 *화성 행궁 앞에 삼남(三南)과 용인으로 통하는 십자로(十字路) 개통하고 상가와 시장을 배치 - 국고로 상인들 인위적 유치 - 농업 혁명 선도 *수원 외곽의 버려진 땅에 대규모 저수지인 만석거 조성하고 대규모 국영시범농장인 대유둔(大有屯) 건설 -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이상 실현 : 2/3는 장용외영의 장교 서리와 군졸, 관예 등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 3분의 1은 가난한 수원 백성들에게 나누어줌 : 둔소(屯所)에서 모든 농기구 제공받음-반은 경작가가 갖고 반은 수성고(修城庫)에서 화성의 보수와 관리 비용으로 사용 - 첫해인 정조 19년(1795)에 당시 최고의 1,500여석의 소출 - 정조 급서 직후 모든 개혁정책 폐기(정순왕후와 심환지 주도) *정조 독살설 4. 망국과 새나라 건설 1)정조 사후 세도정치로 - 노론 일당독재에서 노론 소수 벌열 가문으로 권력 집중화 2)망국 - 야마베 겐타로(山?健太朗) : “병합은 그 경과로 보더라도 일본군의 강대한 무력을 배경으로 한국 상층의 일부를 매수해서 이루어진 것이 명백하다” - 일본은 1910년 10월 7일 76명의 한국인들에게 귀족의 작위와 은사금을 줌 *일부는 왕족 *수작자(授爵者) 당파 분석(64명) - 남인(없음), 북인(2명), 소론(6명), 노론(56명-거부자 포함) *이들에 의해 노론 사관 식민사관이 형성된-현재까지 계속 3)집단 망명 *강화학파(강화도와 충북 진천), 서울의 우당 이회영 일가, 경상도 안동의 김대락, 이상룡 일가 등 *1911년 4월 추가가 대고산에 모여 노천 군중대회 열고 경학사(耕學社:민단자치조직) 건설 : 민주공화제 지향-신흥무관학교 건립-대한민국 건국의 뿌리 4)대한민국의 프레임을 다시 짜야 할 때

  • 조회수 : 55
  • 등록일 : 2014-07-0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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