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래
만촌동은 본래의 이름은 ‘늦이’ 라 하였다. ‘늦이’ 의 ‘늦’ 은 늦다(晩, 遲)라는 뜻이며 ‘이’ 는 원래 인칭대명사이나 고어의 ‘리(里)’ 의 음차(音借)로 보아야 한다. 이곳 주민들은 ‘늦이’ 를 한자로 지잉(遲芿)(遲=訓借, 芿=音借)로도 표기하였다. 따라서 만촌(晩村)의 촌(村)은 ‘리(里)’ 와 같은 ‘마을’ 이란 뜻이다.
이와같은 이름을 사용하게 된것은 예로부터 이곳은 달성(達城)하씨(夏氏), 달성(達城)서씨(徐氏)등이 문호(門戶)를 차려놓고 강학(講學)에 힘쓰고 학문을 숭상하는 나머지 선비의 기질에 따라 생업에는 등한시 하여 농사철이 되어도 항상 이웃마을보다 농사일이 늦어져서 부근 주민들이 농사일에 늦은 곳이라는 뜻으로 불려온 것이 마을의 명칭이 되었다고 한다.
만촌동의 본래의 마을은 지금의 청기와 주유소 뒷편 구릉지대로 마을 주변은 독무산(獨茂山)으로 둘러쌓여 인가(人家)가 만거(萬居)하기에 적지(適地)라 한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연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이곳 만촌동 183번지에 있는 독무재의 동수기에 의하면 숭정(崇禎)4년[중국 명나라 예종의 연호로 B.C 1631년에 해당]독무암누(獨茂岩樓)를 건립하고 이곳을 강학지소(講學之所)로 하여 인근 향도(鄕道)에서 래학자(來學者)가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 혁
1992. 9. 1 | 만촌2동에서 분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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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9. 26 | 청사준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