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모명재

  1. 문화예술
  2. 향토 문화유산
  3. 모명재

모명재(慕明齋)

모명재 전경사진

모명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것이다.

두사충의 호(號)는 모명(募明)으로 중국의 두릉(杜陵)이 고향이다. 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 명나라 제독(提督)이던 이여송(李如松)등과 함께 원병을 와서,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항상 군진(軍陳)¹를 펴는데 조언을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는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가져왔다.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함께 원병을 와서 공을 세웠는데 난이 평정되고 난 후, 조선에 귀화하였다. 조선에 귀화한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일대를 하사 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을 대구에 옮기자 그 땅을 내어놓고 현재의 계산동(桂山洞) 일대로 두씨들의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중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밑으로 거주지를 옮겨 명나라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고국의 천자(天子)를 향해 배례(排禮)를 올렸다고 한다.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兄第峰)기슭에다 묘소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모명재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 이인수가 지었는데, 임란 당시 이순신과 두사충의 친밀한 관계가 후손들에게 까지 접촉을 갖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는 네모 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다. 건물 정면의 여모중방(대청앞 마루바닥에 가로지른 안방)밑은 붉은 벽돌을 쌓아막았다. 가구(架構)는 5량가의 견실한 구조로 종보 위에는 원형 판대공을 세웠으며 앞쪽의 창방(목조건물의 기둥 위에 가로 건너질러 연결하고 평방 또는 화반, 소로 등을 받는 가로재)과 장혀(도리를 받치는 긴나무)을 끼워 장식하였다.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주(註)

  1. 군진(軍陳) : 군대가 전투에 대비하여 펴는 진영(陳營)

 

상세정보

위치안내

  • 소재지 : 대구광역시 수성구 달구벌대로525길 14-21 (만촌동) 위치보기

현재페이지의 내용과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십니까?

사용편의성 만족도
자료 담당자
문화예술과 설희정
전화번호
(☎ 053-666-2174)
최근자료수정일
2020.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