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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1. 행복수성
  2. 수성구 소개
  3. 지명유래
  4. 만촌동

동명유래

  • 본래의 이름은 '늦이'라 하였다. '늦이'의 '늦'은 늦다(晩, 遲)라는 뜻이며 '이'는 원래 인칭대명사이나 고어의 '리(里)'의 음차(音借)로 보아야 한다. 이 곳 주민들은 '늦이'를 한자로 지잉(遲芿)(遲=訓借, 芿=音借)으로도 표기하였다. 따라서 만촌(晩村)의 촌(村)은 '리(里)'와 같은 '마을'이란 뜻이다.
  • 이와같은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은, 예로부터 이곳은 달성(達城)하씨(夏氏), 달성(達城)서씨(徐氏)등이 문호(門戶)를 차려놓고 강학(講學)에 힘쓰고 학문을 숭상하는 반면 선비의 기질에 따라 생업은 등한시하여 농사철이 되어도 항상 이웃마을보다 농사일이 늦어져서 부근 주민들이 농사일에 늦은 곳이라는 뜻으로 불린 것이 마을의 명칭이 되었다고 한다.

만촌동의 자연부락 유래

만촌동의 자연부락 유래 -무등산, 쉬일목, 두루(방)산, 바리곧에골,샘 골, 지장골, 두봉골, 각계골, 남작골, 새마을, 개미마을, 교수촌, 예술인촌, 기자촌
무등산 현재 초원아파트가 무등산의 정상쯤이며 산세가 동대구역 철로를 지나 현재 진로아파트 자리까지 이르렀다 한다. 이곳에서 명절이 되면 동네 아녀자들이 달을 벗삼아 춤을 추었다고 한다.
쉬일목 동부정류장에서 MBC 방송국 쪽 길로 가다가 가장 처음 나타나는 첫 고개에 처낭(돌을 쌓아서 비는 돌무더기)이 있었고 나무가 우거져 쉬일목, 즉 지나가는 사람들이 쉬었다 가는 곳이라는 뜻으로 불렀다 한다. 이곳을 지나가는 나그네와 동네 아가씨의 애틋한 전설이 있었다고 한다.
두루(방)산 두류산(頭流山)이라고 한자로 쓰나, 동네 사람들은 두루방산두루산이라고 불렀다 한다. 현재도 이 산은 남아 있는데 법원과 MBC방송국 뒷산을 말한다. 또 이산을 큰두루방산이라 부르고 쉬일목이 있는 자리를 작은 두루방산이라 불렀다.
바리곧에골 효목도서관과 구 통합병원 사이에는 작은 구릉사이에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 골을 '바리곧에골'이라 불렀다. 바리곧에골은 바로 올라가는 골짜기란 뜻이다.
샘 골 현 태백공사 바로 앞에는 금호강 물이 말라도 마르지 않았다는 샘이 있었다. 그 샘의 물로 온 동네 사람이 가뭄을 넘기고 기근을 면했었는데 도시가 건설되면서 없어져 버렸다.
지장골 지장골(智章谷)은 그 유래가 들(野)이 길다하여 그렇게 불렀으며 현재의 개미마을과 AID아파트까지의 골을 말한다. 현 AID아파트 자리에는 지장지라는 못이 있었으며 해방전에 지장서당이 있었다고 하며 주종을 이룬 성씨는 능성 구(具)씨였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견해도 있다. 지장을 智章으로 표기하지 않고 地藏으로 표기하여 지장골이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이 계곡에 위치한 2군사령부의 남쪽(현재 운동장)에 지장보살을 모신 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두봉골 태초에 세상이 전부 물에 잠기었을 때 봉우리에 두루미 한 마리가 앉을 정도만 남았다 하여 두리봉이라 불리다가 두봉골로 바꿔 불렀다 한다. 하지만 이 지명은 상당히 윤색된 설화를 지닌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처음에 그러한 설화를 지녔더라도 두봉골로 이름이 바뀌고부터는 그 설화를 잃어버리고 단순히 두개의 봉우리 사이에 있는 골짜기란 의미로 전락해 버렸다. 현재 오성고등학교가 위치한 지점에서부터 대구산업정보대 서편을 가리키는데, 두봉골(斗峯谷)이라는 지명 그대로 주변에선 가장 높은 산이다.
각계골 현 영남공고 입구에서 서한아파트까지의 골짜기를 말하며, 동래 정씨들이 임진왜란 때 피난지로 쓰다가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한다. 한자표기가 나와 있지 않는데 조사한 바로는 각계골(覺界谷)로 전한다. 그 유래에 대해선 알 수 없다. 지금 서한아파트 자리가 각계지(覺界池)를 메운 자리라 하며 후세 사람들이 객지못, 각지못, 객기못, 각기못으로 부르나 틀린 명칭이다. 이 주변의 지명들이 불교적인 것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아 이 각계못도 그러한 범주에서 이해함이 좋을 듯하다.
남작골 현 담티고개에서 북쪽편 골짜기를 이르며, 옛날부터 암자가 하나 있다 하여 암자골로 불리우다가 임진왜란 때 두사충장군의 묘를 쓰고 난 후부터 남작골이라 불렀다 한다. 하지만 그곳이 암자골로 불린다고 함으로 그 정확한 지명은 알 수 없고, 추측컨데 두 지명이 동시에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직까지 이 골짜기엔 암자가 있으며 한때는 많은 신도들이 출입을 하였는데 개발제한구역에 묶여 번창하지 못하고 옛날 암자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새마을 1971년 봄 신천시장 철거 이주민 30세대가 담티고개 주변에 정착하기 시작한 이후 당시의 새마을 붐을 타고 재건의 뜻으로 '새마을'이라 지칭하였다 한다. 이것은 자연부락으로서는 비교적 늦게 형성된 것이며, 정부의 시책에 의한 인위적 형성으로 명칭이 생겼다.
개미마을 새마을과는 달리 몇몇 주도적인 단체나 사람들에 의해 생긴 마을이다. 카톨릭 노동청년회에서 김병수씨와 장사익 씨가 넝마주이와 구두닦이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들의 복지를 위해 1968년 12월경에 발족, 현 만촌동 산 358번지에 집을 짓고 산 것이 계기가 되어 붙여진 지명이다. 이 지명은 한국개미회와 관련하여 생겼으며 현재는 그 구성원들이 그곳을 떠나 흩어졌으나 그대로 개미마을로 불리운다. 개미마을은 관 주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종교단체의 주도로 생긴 마을이며 특수한 지역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넝마주이와 구두닦이의 재활을 목적으로 한 지역이다.
교수촌, 예술인촌, 기자촌 만촌2동은 초기에 산야가 많았다가 대구시에 편입된 이후 많은 부락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교수촌, 예술인촌, 기자촌은 이러한 시기에 형성된 것이며, 이것은 몇몇 주택업자들이 영리를 목적으로 그러한 이름을 붙였으며, 자연스럽게 교수, 예술인, 기자 등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유치하고자 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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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5